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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로스 동맹 vs 펠로폰네소스 동맹,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과 결과, 이오니아 전통 쇠퇴 이유

룰루!! 2025. 12. 3. 21:29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과학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이오니아의 전통은 쇠퇴하고 자유로운 실험과 관찰과 관점은 제약을 받으며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는 왜 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한가지 관점만이 옳고 다른 것은 다 틀린 것으로 보는 독재주의, 교주주의는 왜 과학을 쇠퇴시키게 되었을까요?

 

🏛 1. 두 동맹의 개요 비교

구분 : 델로스 동맹 (Delian League)펠로폰네소스 동맹 (Peloponnesian League)

 

형성 시기 기원전 478년경 기원전 6세기 중엽경 (~550년경)
주도 도시국가 아테네 (Athens) 스파르타 (Sparta)
결성 목적 페르시아 전쟁 이후, 다시는 페르시아의 침공을 받지 않기 위한 방위동맹 그리스 내 각 폴리스 간의 균형 유지 및 스파르타의 패권 강화
구성 도시 에게 해 주변 이오니아계 도시국가 중심 (아테네, 사모스, 키오스 등) 펠로폰네소스 반도 내 도리아계 도시국가 중심 (코린토스, 엘리스 등)
본부 위치 초기에 델로스 섬 (후에 아테네로 옮겨감) 스파르타
성격 명목상은 ‘동맹’, 실제로는 **아테네 제국(해상 제국)**으로 발전 느슨한 군사동맹이지만, 실질적으론 스파르타의 패권 체제
해상/육상 중심 해상 중심 (아테네의 강력한 해군력) 육상 중심 (스파르타의 강력한 육군력)

➡️ 연대상으로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더 먼저 생겼습니다.
즉, 스파르타 동맹이 델로스 동맹보다 약 1세기 앞서 결성되었습니다.


⚔️ 2.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발 배경 (기원전 431~404년)

핵심 요약:

"아테네 제국의 팽창을 두려워한 스파르타 동맹의 반격"

🔹 배경 요약

  1. 델로스 동맹이 아테네 제국화
    • 아테네가 동맹국들의 조공(tribute)을 강제로 징수하고, 탈퇴를 막음.
    • 델로스 섬의 금고를 아테네로 옮기며 사실상 제국으로 변질됨.
  2. 스파르타의 경계
    •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아테네의 세력 확장에 위기감을 느낌.
  3. 양 진영의 세력 대립
    • 해상 제국(아테네) vs 육상 제국(스파르타)의 경쟁.
    • 직접적 계기: 코린토스, 코르키라(오늘날 코르푸), 포티디아이 사건 등으로 인해 충돌 격화.

⚡ 전쟁의 경과

  • 기원전 431년: 전쟁 발발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참조)
  • 기원전 404년: 아테네 패망, 스파르타 승리.
  • 전쟁 기간 약 27년.

🏚 3. 전쟁의 결과 및 그리스 사회의 변화

항목내용
결과 아테네 패배 → 민주정 붕괴 → 스파르타 일시적 패권 확립
그리스 전반 영향 전쟁 장기화로 경제·인구 붕괴, 폴리스의 자율성 약화
문화적 영향 이오니아 전통의 쇠퇴, 도리아적 가치(군사적, 보수적 경향) 강화
장기적 결과 스파르타 → 테베 → 마케도니아로 패권 이동 (기원전 338년 필리포스 2세의 정복)

🌅 4. 왜 ‘이오니아 전통’이 쇠퇴했는가?

이오니아 전통: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개방적, 해상 무역 중심의, 철학·과학·예술을 중시하는 합리주의·자유정신 문화.

쇠퇴 이유 요약:

  1. 아테네의 패배 = 이오니아 전통의 중심 붕괴
    • 민주주의, 철학, 예술의 중심이던 아테네가 정치적으로 무너짐.
    • 스파르타식 군사주의와 보수적 가치가 우세해짐.
  2. 경제적 피폐
    • 전쟁으로 도시와 항구 파괴 → 학문·예술 후원자 감소.
  3. 사상적 전환
    • 전쟁과 혼란으로 인간 중심 합리주의 대신 허무주의·회의주의 확산.
    • 소피스트, 회의주의, 이후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이 등장한 것도 이 맥락.
  4. 마케도니아의 등장 (기원전 4세기 말)
    •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등장으로 헬레니즘 시대로 전환.
    • 폴리스 중심의 이오니아적 전통이 종말을 맞음.

📜 연대표 정리

연대사건
기원전 약 550년경 펠로폰네소스 동맹 결성 (스파르타 주도)
기원전 478년경 델로스 동맹 결성 (아테네 주도, 페르시아 방어 목적)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기원전 404년 아테네 패배, 스파르타 패권 확립
기원전 371년 테베의 레욱트라 전투, 스파르타 패권 붕괴
기원전 338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 통일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망 → 헬레니즘 시대 개막

🧭 요약 한줄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스파르타)은 델로스 동맹(아테네)보다 약 100년 먼저 생겼으며,
두 동맹의 패권 경쟁이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을 일으켰다.
이 전쟁의 결과로 아테네가 몰락하면서 이오니아적 자유·합리주의 전통은 급격히 쇠퇴하고,
그리스는 점차 마케도니아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과학적 특징 → 쇠퇴 원인 →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 → 탈레스·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전환 → 과학의 정체(도그마화)

 

1. 이오니아 전통(이오니아 자연철학)의 과학적 특징

(탈레스–아낙시만드로스–아낙시메네스,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 전통은 서양 과학의 기원으로 평가됩니다. 그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A. 핵심 특징

1) 자연현상을 신화가 아닌 ‘자연적 원인’으로 설명

이오니아 철학자들은 신들의 기분이나 의지가 아니라, 물리적·자연적 법칙으로 세계를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 탈레스: 만물은 “자연 안에 그 원인을 가진다.”
  • 아낙시만드로스: 천둥·지진·바람 등을 기계적 원리로 설명.
  • 아낙시메네스: 공기의 응축·희박화라는 물리 과정으로 세계를 설명.

출처:
–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A3
– Kirk, Raven & Schofield, The Presocratic Philosophers (1999)


2) 단일한 근원 원리(ἀρχή) 탐구

모든 세계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기초 원리(arche)**를 찾으려 했습니다.

  • 탈레스: 물
  • 아낙시만드로스: 무한자(apeiron)
  • 아낙시메네스: 공기

이는 세계를 하나의 원리로 통합하려는 최초의 ‘통일이론’적 접근이었습니다.


3) 비판적 사고(합리적 논쟁의 시작)

이오니아 사상가들은 서로를 논리적으로 비판했습니다.

  • 아낙시만드로스는 “물로는 불을 설명할 수 없다”며 탈레스를 비판.
  • 비판을 통해 이론이 진화하는 과학적 토론 구조가 등장.

출처: Vlastos, “The Presocratics,” Philosophical Quarterly (1955)


4) 관찰 중심의 경험적 태도

정량적 실험은 아니었지만, 관찰 데이터를 바탕으로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 아낙시만드로스: 인간이 어류에서 유래했다는 진화적 추측
  • 천문 관측에 근거한 우주론적 모델 제시

5) 종교·사제 집단과 분리된 지식 체계

과학이 성직자나 신전의 권위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개인 철학자에 의해 수행됨.


2. 이오니아 과학이 쇠퇴하게 된 이유

(기원전 5~4세기)

A. 정치·군사적 요인

1) 페르시아의 지배와 전쟁

이오니아 도시들은 반복적으로 페르시아의 침공·지배를 경험했고, 지식 중심지였던 밀레토스가 붕괴.

2)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

아테네(이오니아적 문화의 중심)가 패망하면서 경제·연구 기반 모두 파괴됨.

출처: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B. 사상적 요인

3) 소피스트의 상대주의·회의주의 확산

  • 인식은 상대적
  • 자연학보다 인간·언어·설득술 중시
    → 자연철학 약화

4) 소크라테스의 등장: ‘자연학 포기’ 선언

소크라테스는 자연 연구를 “자신을 향한 탐구에 방해되는 것”이라 말함.

“나는 자연 연구를 버렸다.”
— 플라톤, 『파이돈』 96a

→ 철학이 자연에서 윤리로 방향 전환.


5)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이상주의

플라톤은:

  • 감각 세계는 불완전하고 믿을 수 없음
  • 진정한 지식은 이데아(Forms)
  • 물리학은 “그럴듯한 이야기(εἰκότες μῦθοι)”일 뿐

→ 경험적 연구 경시, 수학적·형이상학적 우주론 우선.


6)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teleology) 강화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목적을 가진 존재로 설명했습니다.

  • 물체는 “자연적 장소”로 향함
  • 생물은 “본성적 목적”을 따라 움직임

이는 기계적 설명(이오니아식)을 억압하고,
과학을 형이상학적 틀 안에 가두는 효과를 냈습니다.


3. 피타고라스학파가 과학 발전과 쇠퇴에 미친 이중적 영향

피타고라스학파는 수학적 혁신신비주의적 도그마라는 두 측면을 갖습니다.


A. 긍정적 영향 (과학 촉진)

1) 자연은 수로 설명될 수 있다는 혁명적 발상

피타고라스학파는 “만물은 수다(all is number)”라 주장했고:

  • 조화적 비율
  • 무리수의 발견
  • 기하학 기초

등을 이끌어, 수학적 자연철학의 길을 열었습니다.

출처:
Walter Burkert, Lore and Science in Ancient Pythagoreanism (1972)


2) 천문학의 탈신화

  • 지구 구형설
  • 천체의 조화
  • 지구 운동 가능성 제시

B. 부정적 영향 (과학 쇠퇴에 기여)

1) 수학을 과학이 아니라 ‘신비주의’로 사용

숫자를 신성시하고, 상징적 의미를 부여함.

  • 4 = 신성
  • 10 = 완전
  • 우주의 구조는 수적 조화에서 결정됨

실험·관찰보다 숫자의 신비성을 우선시함.


2) 폐쇄적·비판 금지적 집단

피타고라스 학단은 비밀 결사였고 비판을 금지하며 교리를 은폐.

→ 논쟁·검증 기반의 과학적 발전이 차단.


3) 경험적 불일치보다 ‘조화’를 우선

관측 결과가 조화적 수비례를 깨면
관측이 아니라 우주론을 수정하지 않음.

이 경향은 플라톤 철학에 강하게 스며들었음.


4. 탈레스 → 소크라테스 →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이 사상 변화가 어떻게 과학을 느리게 만들었는가?

A. 탈레스와 이오니아인들: 자연주의·경험주의

  • 자연은 자연적으로 설명
  • 신화 배제
  • 비판적 토론
  • 관찰 중시

→ “원시적 과학”의 발아.


B. 소크라테스: 윤리 중심의 철학 혁명

소크라테스 이후:

  • 철학의 중심이 자연에서 **인간(도덕)**으로 이동
  • 자연 연구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

C. 플라톤: 경험 배제 + 수학 우월 + 이데아 세계 강조

플라톤의 영향:

  1. 감각 경험은 불완전
  2. 수학적 형이상학이 진리
  3. 우주론은 “수학적 조화”에 맞춰야 함
  4. 천문학은 관측이 아니라 “원(circle)”로 설명해야 함

플라톤은 천문학자들에게:

현실이 아니라 완벽한 원의 운동으로 우주를 설명하라고 요구
(“현상을 구하라 — save the phenomena”)

출처:
– 『티마이오스』
– Thomas Kuhn, The Copernican Revolution (1957)

→ 관찰보다 이론(특히 이상적 수학)이 우선됨.


D. 아리스토텔레스: 체계화 + 목적론 강화 → 과학의 정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철학을 체계화했지만:

  • 목적론적 설명
  • 원인 4분설
  • 경험보다 논증 우위
  • 지구 중심 우주론 고착

이 체계는 고대~중세 동안 비판 불가한 ‘권위’가 됨.

출처:
– G.E.R. Lloyd, Early Greek Science
– Jonathan Barnes, Aristotle

→ 비판적 과학이 아니라 학교철학 + 권위주의적 교과 체계가 됨.


5. 과학이 멈추게 된(정체된) 핵심 이유 정리

철학의 방향 전환이 핵심:

관찰·비판 → 수학적 형식주의 → 형이상학 → 목적론적 체계

  1. 경험적 방법의 상실
  2. 폐쇄적 학파 형성(피타고라스·아카데미아·리케이온)
  3. 목적론이 기계적 설명을 억압
  4. 아리스토텔레스가 절대 권위가 되면서 반박 불가능해짐

이로 인해 고대 그리스의 과학은 기원전 4세기 이후 급격히 정체.


⭐ 한 문장 요약

이오니아 과학은 자연주의·관찰·비판에 기반해 서양 과학의 기초를 이뤘지만,
피타고라스학파의 수신비(數神祕)·플라톤의 형이상학·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이 결합하면서
과학은 경험적 탐구에서 벗어나 수학적 형식주의와 도그마적 체계로 흘러가 결국 정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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