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과학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이오니아의 전통은 쇠퇴하고 자유로운 실험과 관찰과 관점은 제약을 받으며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는 왜 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한가지 관점만이 옳고 다른 것은 다 틀린 것으로 보는 독재주의, 교주주의는 왜 과학을 쇠퇴시키게 되었을까요?
🏛 1. 두 동맹의 개요 비교
| 형성 시기 | 기원전 478년경 | 기원전 6세기 중엽경 (~550년경) |
| 주도 도시국가 | 아테네 (Athens) | 스파르타 (Sparta) |
| 결성 목적 | 페르시아 전쟁 이후, 다시는 페르시아의 침공을 받지 않기 위한 방위동맹 | 그리스 내 각 폴리스 간의 균형 유지 및 스파르타의 패권 강화 |
| 구성 도시 | 에게 해 주변 이오니아계 도시국가 중심 (아테네, 사모스, 키오스 등) | 펠로폰네소스 반도 내 도리아계 도시국가 중심 (코린토스, 엘리스 등) |
| 본부 위치 | 초기에 델로스 섬 (후에 아테네로 옮겨감) | 스파르타 |
| 성격 | 명목상은 ‘동맹’, 실제로는 **아테네 제국(해상 제국)**으로 발전 | 느슨한 군사동맹이지만, 실질적으론 스파르타의 패권 체제 |
| 해상/육상 중심 | 해상 중심 (아테네의 강력한 해군력) | 육상 중심 (스파르타의 강력한 육군력) |
➡️ 연대상으로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더 먼저 생겼습니다.
즉, 스파르타 동맹이 델로스 동맹보다 약 1세기 앞서 결성되었습니다.
⚔️ 2.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발 배경 (기원전 431~404년)
핵심 요약:
"아테네 제국의 팽창을 두려워한 스파르타 동맹의 반격"
🔹 배경 요약
- 델로스 동맹이 아테네 제국화
- 아테네가 동맹국들의 조공(tribute)을 강제로 징수하고, 탈퇴를 막음.
- 델로스 섬의 금고를 아테네로 옮기며 사실상 제국으로 변질됨.
- 스파르타의 경계
-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아테네의 세력 확장에 위기감을 느낌.
- 양 진영의 세력 대립
- 해상 제국(아테네) vs 육상 제국(스파르타)의 경쟁.
- 직접적 계기: 코린토스, 코르키라(오늘날 코르푸), 포티디아이 사건 등으로 인해 충돌 격화.
⚡ 전쟁의 경과
- 기원전 431년: 전쟁 발발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참조)
- 기원전 404년: 아테네 패망, 스파르타 승리.
- 전쟁 기간 약 27년.
🏚 3. 전쟁의 결과 및 그리스 사회의 변화
| 결과 | 아테네 패배 → 민주정 붕괴 → 스파르타 일시적 패권 확립 |
| 그리스 전반 영향 | 전쟁 장기화로 경제·인구 붕괴, 폴리스의 자율성 약화 |
| 문화적 영향 | 이오니아 전통의 쇠퇴, 도리아적 가치(군사적, 보수적 경향) 강화 |
| 장기적 결과 | 스파르타 → 테베 → 마케도니아로 패권 이동 (기원전 338년 필리포스 2세의 정복) |
🌅 4. 왜 ‘이오니아 전통’이 쇠퇴했는가?
이오니아 전통: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개방적, 해상 무역 중심의, 철학·과학·예술을 중시하는 합리주의·자유정신 문화.
쇠퇴 이유 요약:
- 아테네의 패배 = 이오니아 전통의 중심 붕괴
- 민주주의, 철학, 예술의 중심이던 아테네가 정치적으로 무너짐.
- 스파르타식 군사주의와 보수적 가치가 우세해짐.
- 경제적 피폐
- 전쟁으로 도시와 항구 파괴 → 학문·예술 후원자 감소.
- 사상적 전환
- 전쟁과 혼란으로 인간 중심 합리주의 대신 허무주의·회의주의 확산.
- 소피스트, 회의주의, 이후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이 등장한 것도 이 맥락.
- 마케도니아의 등장 (기원전 4세기 말)
-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등장으로 헬레니즘 시대로 전환.
- 폴리스 중심의 이오니아적 전통이 종말을 맞음.
📜 연대표 정리
| 기원전 약 550년경 | 펠로폰네소스 동맹 결성 (스파르타 주도) |
| 기원전 478년경 | 델로스 동맹 결성 (아테네 주도, 페르시아 방어 목적) |
| 기원전 431년 |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
| 기원전 404년 | 아테네 패배, 스파르타 패권 확립 |
| 기원전 371년 | 테베의 레욱트라 전투, 스파르타 패권 붕괴 |
| 기원전 338년 |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 통일 |
| 기원전 323년 |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망 → 헬레니즘 시대 개막 |
🧭 요약 한줄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스파르타)은 델로스 동맹(아테네)보다 약 100년 먼저 생겼으며,
두 동맹의 패권 경쟁이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을 일으켰다.
이 전쟁의 결과로 아테네가 몰락하면서 이오니아적 자유·합리주의 전통은 급격히 쇠퇴하고,
그리스는 점차 마케도니아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오니아 자연철학의 과학적 특징 → 쇠퇴 원인 →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 → 탈레스·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전환 → 과학의 정체(도그마화)
1. 이오니아 전통(이오니아 자연철학)의 과학적 특징
(탈레스–아낙시만드로스–아낙시메네스,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 전통은 서양 과학의 기원으로 평가됩니다. 그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A. 핵심 특징
1) 자연현상을 신화가 아닌 ‘자연적 원인’으로 설명
이오니아 철학자들은 신들의 기분이나 의지가 아니라, 물리적·자연적 법칙으로 세계를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 탈레스: 만물은 “자연 안에 그 원인을 가진다.”
- 아낙시만드로스: 천둥·지진·바람 등을 기계적 원리로 설명.
- 아낙시메네스: 공기의 응축·희박화라는 물리 과정으로 세계를 설명.
출처:
–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A3
– Kirk, Raven & Schofield, The Presocratic Philosophers (1999)
2) 단일한 근원 원리(ἀρχή) 탐구
모든 세계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기초 원리(arche)**를 찾으려 했습니다.
- 탈레스: 물
- 아낙시만드로스: 무한자(apeiron)
- 아낙시메네스: 공기
이는 세계를 하나의 원리로 통합하려는 최초의 ‘통일이론’적 접근이었습니다.
3) 비판적 사고(합리적 논쟁의 시작)
이오니아 사상가들은 서로를 논리적으로 비판했습니다.
- 아낙시만드로스는 “물로는 불을 설명할 수 없다”며 탈레스를 비판.
- 비판을 통해 이론이 진화하는 과학적 토론 구조가 등장.
출처: Vlastos, “The Presocratics,” Philosophical Quarterly (1955)
4) 관찰 중심의 경험적 태도
정량적 실험은 아니었지만, 관찰 데이터를 바탕으로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 아낙시만드로스: 인간이 어류에서 유래했다는 진화적 추측
- 천문 관측에 근거한 우주론적 모델 제시
5) 종교·사제 집단과 분리된 지식 체계
과학이 성직자나 신전의 권위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개인 철학자에 의해 수행됨.
2. 이오니아 과학이 쇠퇴하게 된 이유
(기원전 5~4세기)
A. 정치·군사적 요인
1) 페르시아의 지배와 전쟁
이오니아 도시들은 반복적으로 페르시아의 침공·지배를 경험했고, 지식 중심지였던 밀레토스가 붕괴.
2)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
아테네(이오니아적 문화의 중심)가 패망하면서 경제·연구 기반 모두 파괴됨.
출처: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B. 사상적 요인
3) 소피스트의 상대주의·회의주의 확산
- 인식은 상대적
- 자연학보다 인간·언어·설득술 중시
→ 자연철학 약화
4) 소크라테스의 등장: ‘자연학 포기’ 선언
소크라테스는 자연 연구를 “자신을 향한 탐구에 방해되는 것”이라 말함.
“나는 자연 연구를 버렸다.”
— 플라톤, 『파이돈』 96a
→ 철학이 자연에서 윤리로 방향 전환.
5)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이상주의
플라톤은:
- 감각 세계는 불완전하고 믿을 수 없음
- 진정한 지식은 이데아(Forms)
- 물리학은 “그럴듯한 이야기(εἰκότες μῦθοι)”일 뿐
→ 경험적 연구 경시, 수학적·형이상학적 우주론 우선.
6)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teleology) 강화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목적을 가진 존재로 설명했습니다.
- 물체는 “자연적 장소”로 향함
- 생물은 “본성적 목적”을 따라 움직임
이는 기계적 설명(이오니아식)을 억압하고,
과학을 형이상학적 틀 안에 가두는 효과를 냈습니다.
3. 피타고라스학파가 과학 발전과 쇠퇴에 미친 이중적 영향
피타고라스학파는 수학적 혁신과 신비주의적 도그마라는 두 측면을 갖습니다.
A. 긍정적 영향 (과학 촉진)
1) 자연은 수로 설명될 수 있다는 혁명적 발상
피타고라스학파는 “만물은 수다(all is number)”라 주장했고:
- 조화적 비율
- 무리수의 발견
- 기하학 기초
등을 이끌어, 수학적 자연철학의 길을 열었습니다.
출처:
Walter Burkert, Lore and Science in Ancient Pythagoreanism (1972)
2) 천문학의 탈신화
- 지구 구형설
- 천체의 조화
- 지구 운동 가능성 제시
B. 부정적 영향 (과학 쇠퇴에 기여)
1) 수학을 과학이 아니라 ‘신비주의’로 사용
숫자를 신성시하고, 상징적 의미를 부여함.
- 4 = 신성
- 10 = 완전
- 우주의 구조는 수적 조화에서 결정됨
실험·관찰보다 숫자의 신비성을 우선시함.
2) 폐쇄적·비판 금지적 집단
피타고라스 학단은 비밀 결사였고 비판을 금지하며 교리를 은폐.
→ 논쟁·검증 기반의 과학적 발전이 차단.
3) 경험적 불일치보다 ‘조화’를 우선
관측 결과가 조화적 수비례를 깨면
관측이 아니라 우주론을 수정하지 않음.
이 경향은 플라톤 철학에 강하게 스며들었음.
4. 탈레스 → 소크라테스 →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이 사상 변화가 어떻게 과학을 느리게 만들었는가?
A. 탈레스와 이오니아인들: 자연주의·경험주의
- 자연은 자연적으로 설명
- 신화 배제
- 비판적 토론
- 관찰 중시
→ “원시적 과학”의 발아.
B. 소크라테스: 윤리 중심의 철학 혁명
소크라테스 이후:
- 철학의 중심이 자연에서 **인간(도덕)**으로 이동
- 자연 연구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
C. 플라톤: 경험 배제 + 수학 우월 + 이데아 세계 강조
플라톤의 영향:
- 감각 경험은 불완전
- 수학적 형이상학이 진리
- 우주론은 “수학적 조화”에 맞춰야 함
- 천문학은 관측이 아니라 “원(circle)”로 설명해야 함
플라톤은 천문학자들에게:
현실이 아니라 완벽한 원의 운동으로 우주를 설명하라고 요구
(“현상을 구하라 — save the phenomena”)
출처:
– 『티마이오스』
– Thomas Kuhn, The Copernican Revolution (1957)
→ 관찰보다 이론(특히 이상적 수학)이 우선됨.
D. 아리스토텔레스: 체계화 + 목적론 강화 → 과학의 정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철학을 체계화했지만:
- 목적론적 설명
- 원인 4분설
- 경험보다 논증 우위
- 지구 중심 우주론 고착
이 체계는 고대~중세 동안 비판 불가한 ‘권위’가 됨.
출처:
– G.E.R. Lloyd, Early Greek Science
– Jonathan Barnes, Aristotle
→ 비판적 과학이 아니라 학교철학 + 권위주의적 교과 체계가 됨.
5. 과학이 멈추게 된(정체된) 핵심 이유 정리
철학의 방향 전환이 핵심:
관찰·비판 → 수학적 형식주의 → 형이상학 → 목적론적 체계
- 경험적 방법의 상실
- 폐쇄적 학파 형성(피타고라스·아카데미아·리케이온)
- 목적론이 기계적 설명을 억압
- 아리스토텔레스가 절대 권위가 되면서 반박 불가능해짐
이로 인해 고대 그리스의 과학은 기원전 4세기 이후 급격히 정체.
⭐ 한 문장 요약
이오니아 과학은 자연주의·관찰·비판에 기반해 서양 과학의 기초를 이뤘지만,
피타고라스학파의 수신비(數神祕)·플라톤의 형이상학·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이 결합하면서
과학은 경험적 탐구에서 벗어나 수학적 형식주의와 도그마적 체계로 흘러가 결국 정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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